이미지명
이미지명
게시글 검색
절강팽씨
관리자 조회수:491 124.216.137.164
2020-11-13 15:56:43
절강팽씨(浙江彭氏)는 조선(朝鮮) 선조(宣祖) 때 조선에 원병(援兵)을 데리고 온 명나라 팽우덕(彭友德) 장군을 시조(始祖)로 한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팽우덕은 명나라 중군부총병(中軍副總兵) 도독첨사(都督僉使)가 되어 동원장사(東援壯士)로 뽑힌 아들
팽신고(彭信古)와 함께 1597년(조선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와 왜군을 무찌르는 많은 전공(戰功)을
세우고 귀국하였다. 그후 팽신고가 명나라 의종(毅宗) 때 나라를 위해 순절(殉節)하였다.
팽우덕은 임진왜란 때도 명나라 지원군의 50여 장군들 중의 한 사람으로 공을 세웠다.
그는 이여송의 지휘 하에 곳곳에서 전공을 세웠고, 나중에는 천한군을 혼자 지휘하기도 하였다.
정유재란 때의 남부 총공격 무렵에는 중로군의 부장이 되어 사천을 수호했다.
그의 아들 팽신고 장군도 여순항에서 명나라 왕의 칙사미 10만석을 운반하는 등 부자간에 조선 수호를 위해 몸바쳤다.
그후 명나라가 망할 때 팽신고의 손자 팽부산(彭釜山)이 자손들과 함께 조선으로 망명(亡命)하였다.
팽우덕은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항주부(杭州府) 오강현(吳江縣) 사람이다.
본관은 절강(浙江)이고 자는 수경(秀卿).삼로(三老), 호는 만정(晩亭)이다.
팽우덕 장군의 묘는 원래 부산 동래 만덕산에 있었으나 그 뒤 정조 21년(서기 1797년)에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경남 진해시 속천 안곡동 산 46만평을 하사하고 고절산(高節山)이라 명명하여 이곳으로 이장하게 하였다.
팽우덕 장군의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팽우덕 묘비는 어왜총병 육군대도독(御倭總兵陸軍大都督)이라하여 장군의 무덤 옆에 세워져 있는 비석이다.
묘비는 일제강점기에 인위적인 훼손으로 비명(碑銘)과 음기(陰記)의 판독이 거의 불가능하다.
'절강팽공(浙江彭公)' 등 전면의 큰 글자 일부와 음기의 상단부 일부를 판독할 수 있을 정도이다.
팽우덕 장군의 아들 팽신고가 선조 임금을 만난 가 지금도 전해진다.
명나라에서 조선에 파병된 장수 팽유격(彭遊擊)은 술좌석에서 파랑국(波浪國)에서 온 신병(神兵)을 선조에게 소개했다.
팽유격은 팽신고인데 유격이라는 것은 그의 직위였다. 파랑국은 지금의 포르투갈을 음차표기로 쓴 것이다.
팽유격은 선조에게 "제가 데리고 온 병사들 중에 호광(湖廣)의 극남(極南)에 있는 파랑국 사람으로
바다 셋을 건너고 조선과는 15만여 리나 떨어져 있는 곳에서 온 귀한 전투병입니다"라고 이야기했다.
팽유격은 그들이 조총과 여러가지 무예에 출중하여 이번 전투에서 많은 활약을 할 것이라고 의기양양해했다.
선조가 말하기를 "조선은 한쪽 구석에 있어서 어디 이런 신병을 볼 수 있겠소이까,
지금 대인의 덕택으로 이를 보니 이 또한 황은(皇恩)이 아닐 수 없소이다,
이제 저 무식한 왜놈들을 섬멸하는 날이 곧 올 수 있겠소이다" 하며 감격의 웃음을 팽유격에게 보냈다.
팽우덕 장군의 후손들은 경남 창원, 부산 등지에 살면서 선조의 출신지인 절강(浙江)을 본관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절강(浙江)은 중국 동남부 동해(東海) 연안에 위치하고 있으며, 양자강(陽子江) 하류의 남부를 점하고 있다.
전당강(錢塘江)에 의하여 동서로 나누어지고 항주(抗州)를 성도(省都)로 하고 있다.
시조 팽우덕의 5세손 팽우창(彭雨昌)은 조선시대 정삼품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냈고,
6세손 팽흥석(彭興碩)과 7세손 팽수봉(彭壽鳳)이 종이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역임하였다.
팽신고(彭信古)는 조선조(朝鮮朝)에 유격장(遊擊將)이며 팽랑기(彭郞己)는 정삼품 사역원정(司譯院正)에 오르고
팽광석(彭光碩)은 종이품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
* 현재 해군사관학교 뒷산에 위치한 고절산은 국가소유로 되어있다.
* 일제강점기에 군사 목적으로 빼앗긴 고절산은 해방후에 국가를 상대로 소유권 소송을 하여
1심 승소 판결을 받았으나, 군사지역이라는 이유인지는 몰라도 조선 정조가 하사한 땅 문서를
제시하였으나 증거가 되지 못하였고, 일제강점기에 토지 신고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결국 패소하고 말았다(1970년 9월 30일)
*재판중에 국가에서 타협안을 제시하였다는 윗분들의 이야기도 있었으나,
당사자들이 모두 사망하여 확인할 길이 없다.
* 지금 그 곳에는 해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260여구의 절강팽씨 조상들 무덤은 묵묵히 고절산을 지키고 있다.

댓글[0]

열기 닫기